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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2주년
천년고찰 금산사

금산사는 백제법왕 원년(599)에 창건되었다.

통일신라의 의적화상은 당나라 현장문하에서 유학하고 금산사에 돌아와 25부 70여권의 방대한 유식사상의 저술을 남겼다. 숭제법사와 진표율사를 거쳐 고려 혜덕왕사로 이어지면서 유식학 법상종의 종주로 자리매김하였다. 


정유재란 후, 1635년 수문대사가 금산사를 중건하면서 미륵과 화엄의 2원 체계로 도량을 정비하였다. 조선영조 원년 환성 지안대사는 전국에서 모여든 1,400여 스님이 운집한 가운데 화엄산림을 개최하였다. 근래들어 월주스님에 의해 미륵바로알기운동을 펼치고있으며, 대사회 활동을 통해 자비와 보살행을 몸소 실천하는 사찰임을 증명해보이고 있다. 


금산사백제시대에 창건되어 1400여 년의 역사를 이어 오늘날까지 법등을 밝혀온 유서 깊은 명찰이다. 

금산사 일원은 사적 제49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호남평야 가운데 우뚝 솟은 모악산 서쪽 자락에 위치해 있다. 정유재란 때 왜군의 방화로 모든 건물과 산내의 40여 개 암자가 완전히 소실되는 등 수난을 겪었으나 이후 많은 문화재가 조성되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금산사는 백제 법왕1년(599년)에 나라의 복을 비는 자복사資福寺로 창건된 것으로 전한다. 진표율사眞表律師가 금산사의 숭제법사崇濟法師(혹은 순제법사順濟法師)에게 출가했다는 기록과 통일신라시대 초에 활동한 의적義寂(681-?) 스님이 당나라 현장스님에게 유학하고 돌아와 금산사에 머물며 25부 70여권의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는 기록들을 통해 당시 금산사가 창건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금산사가 대사찰의 면모를 갖춘 것은 통일신라시대 진표율사가 주석하면서 부터이다. 진표스님은 미륵전을 짓고 미륵장륙상을 조성하였으며 해마다 단壇을 열어 법시法施를 널리 베풀었다.

후삼국시대에 금산사는 다시금 역사서에 등장한다. 후백제의 군주 견훤이 아들 신검 등에 의해 금산사에 감금되었다가 탈출하여 왕건에게 투항하였다는 내용이다. 금산사에는 ‘견훤성문’으로 불리는 개화문과 석성 등 견훤과 관련된 유적이 전하고 있다.




<금산사사적 金山寺事蹟 History of Geumsansa Temple, 조선 1705년, 33.3×21.4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백제 : 이 세상의 도솔천 모악산 금산사 

중관 해안中觀海眼이 쓴 『금산사사적』(1635) 에는 “백제 법왕 1년(599)에 법왕이 즉위하여 살생을 금지하는 법을 발표하고, 이듬해(600)에 금산(사)에 38명의 승려를 득도시켰으며, 또 왕흥사王興寺를 창건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에 법왕 1년(599)에 ‘살생을 금하는 령이 내려졌다’는 기록과 법왕 2년(600) 정월에 ‘왕흥사를 창건하고 승려 30인을 득도시켰다.’는 내용을 근거로 금산사의 창건을 짐작한 것으로 보인다. 진표율사가 금산사의 숭제법사에게 출가했다는 기록이나 통일신라시대 활동한 의적스님이 금산사에 주석했다는 기록을 보면 금산사가 백제시대에 창건되었음은 확실하다. 다만 당시 금산사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진표율사의 주석 이후 금산사는 대가람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진표율사 초창기 가람배치도, 오세덕, 금산사의 시대별 가람배치 변화와 후원자>



통일신라 : 진표율사, 미륵신앙의 토대를 세우다

진표율사는 신라 경덕왕 대에 활동한 스님으로 사실상 금산사의 창건주라고 할 수 있다. 진표율사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진표전간眞表傳簡」과 「관동풍악발연수석기關東楓嶽鉢淵藪石記」, 『속고승전續高僧傳』 등에 비교적 상세하게 남아 있다.

 

진표율사는 완산주 만경현 출신으로 아버지는 진내말眞乃末, 어머니는 길보랑吉寶娘이다. 12세에 출가의 뜻을 품고 유명한 스승을 찾아 나섰다. 그리하여 금산사의 숭제법사에게 출가하였다. 출가 이후 진표율사는 끝이 없는 수행에 들었다. 특히 ‘율사’라는 존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계戒를 매우 중시하였고, 계법戒法을 얻기 위해 철저한 수행을 하였다. 자신의 몸을 버리는 망신참법亡身懺法을 행한 진표율사는 지장보살로부터 정계淨戒를 받았지만 수행을 멈추지 않고 계속하였다. 마침내 미륵보살의 현신으로부터 『점찰선악업보경占察善惡業報經』 두 권과 189개의 간자簡子를 받았다.  

 

율사는 교법을 받고 금산사를 중창하기 위해 산을 내려왔다. 대연진大淵津에 이르렀을 때 용왕龍王이 나타나 옥으로 된 가사를 바쳤다. 스님은 용왕이 거느린 8만 권속의 호위를 받으며 금산사에 이르렀다. 사방에서 바람들이 모여들어 몇 일만에 절이 완성되었다. 또 미륵이 도솔천兜率天에서 감응하여 구름을 타고 내려와서 스님께 계법戒法을 주니 스님은 사람들에게 권하여 미륵장륙상彌勒丈六像을 만들게 했다. 또 미륵보살이 내려와서 계법을 주던 모양을 금당金堂 남쪽 벽에 그렸다. 갑신년(764) 6월 9일에 주성하여 병오년(766) 5월 1일에 금당에 안치하니 이 해가 대력大曆 원년(766)이었다.


이후 진표율사는 속리산 법주사法住寺를 중창하고 이어 금강산 발연사鉢淵寺를 개창하였다. 진표율사는 교화에도 힘썼다. 특히 점찰법占察法을 행한 점찰법회를 자주 열었다. 점찰법이란 『점찰선악업보경』에 의거하여 나무로 깎아 만든 목륜木輪을 굴려서 나타난 모양으로 점을 치는 것이다. 점찰법으로 전생에 지은 죄를 알고 이를 참회하고자 하였다. 진표율사는 미륵보살로부터 받은 189개의 간자로 점찰법을 했으며, 이를 통한 참회로 수행하였다. 점찰법을 통한 신앙행위는 대중들에게 미륵신앙을 널리 전파하는 방편이 되기도 하였다.




고려시대 : 법상종의 중심도량이 되다

법상종法相宗은 유식사상唯識思想과 미륵신앙을 기반으로 성립된 종파로, 고려시대 11세기 초 목종과 현종 이후 왕실과 관련을 맺으면서 크게 융성하였다. 이 시기에 법상종의 대표적인 사찰인 금산사 또한 중흥하였다. 금산사 「혜덕왕사진응탑비문慧德王師眞應塔碑文」에 의하면, 문종대 대표적인 외척세력이자 권문세족이었던 이자연李子淵의 다섯째 아들이었던 혜덕왕사 소현慧德王師 韶顯(1038-1096)이 금산사의 주지로 취임하면서 금산사는 최대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혜덕왕사가 금산사에 주석하는 동안 남아 있는 법당을 모두 보수·중축하는 것은 물론 새롭게 중창하였다. 이는 진표율사의 중건 이후 최대 규모이다. 현존하는 석조물인 방등계단, 석련대, 노주 등이 이때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금산사의 사역이 대사구大寺區, 봉천원구奉天院區, 광교원구廣敎院區의 세 구역으로 나뉘게 된 것도 모두 혜덕왕사의 중창에서 비롯된다. 「혜덕왕사진응탑비문」에는 당시 모습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스님(소현)은 일찍이 금산사의 남쪽 60보쯤 되는 지점에 승지勝地를 골라 광교원廣敎院을 창설하고, 유식종에 관한 경론經論을 각조刻雕하여 광교원에 진장鎭藏하였다. 그리고 사원 가운데 하나의 금당을 따로 두어 노사나불盧舍那佛과 현장玄奘과 규기窺基 두 스님의 상像을 (결락) 봉안하였다. 태강太康 9년(1083)으로부터 스님의 말년에 이르기까지 자은대사慈恩大師가 지은 『법화현찬法華玄贊』과 『유식술기唯識述記』 등의 장소章疏를 찾아서 32부部 공계共計 353권을 그 본本을 고정考正하고 각공刻工을 모집하여 판각板刻하고는 개인적으로 지묵紙墨을 갖추어 인경印經하여 유통함으로써 널리 법보시法布施를 행하였다.


혜덕왕사는 11세기 금산사에 ‘광교원’을 설치하고 이곳에서 법상종의 교리와 관련된 불경을 간행하여 널리 홍포하였다. 혜덕왕사가 당시 금산사를 중창한 것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정유재란 때 방화로 소실되기 이전 금산사의 모습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금산사지金山寺誌』에는 당시 대사구, 봉천원, 광교원의 세 구역에 당우가 있었다고 한다.

이 전각 가운데 고려 후기와 조선 전기에 건립된 것도 있으나 대부분 인주 이씨의 막대한 후원을 받은 혜덕왕사에 의하여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제자로 도생승통을 비롯한 1천여 명이 있었다고 하니, 당시 금산사의 교세가 얼마나 대단하였는지를 가늠하게 한다.


혜덕왕사 이후 금산사의 주지를 이어받은 분은 도생승통導生僧統 탱竀이다. 도생승통은 고려 문종의 여섯 째 아들이자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1055-1101)의 동생으로 문종 24년(1070)에 혜덕왕사에게 계를 받고 출가하였다. 출가 이후의 행적은 자세히 남아 있지 않으나, 오랫동안 속리산 법주사의 주지를 맡고 있다가 숙종 원년(1096) 혜덕왕사가 입적하자 금산사의 주지를 겸하게 되었다. 고려시대 승통은 교종의 최고법계이므로 도생승통은 당시 최고의 지위까지 오른 스님이었다.


무신들의 정변 이후 불교계는 선종 중심으로 변화하면서 법상종의 종찰이던 금산사의 사세는 약화되었다. 무신정권이 물러나고 원 간섭기인 충렬왕대에 들어서자 교종의 사세가 확장되었다. 법상종이 불교계를 주도하게 되면서 금산사는 다시 빛을 보게 된다. 충렬왕 24년(1298)에 효정승통孝楨僧統이 금산사의 주지를 역임하게 되는데 이는 금산사가 승통사찰로서 사격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혜덕왕사 이후 금산사를 크게 중창한 분은 원명대사 해원圓明大師 海圓(1262-1330)이다. 충숙왕 15년(1328) 원나라에서 유학하여 유식학과 계율로 크게 이름을 떨쳤으며 묘탑과 비석이 중국 숭은복원사崇恩福元寺에 전한다. 금산사 주지로 주석하면서 법회를 열고 절을 크게 중창하였다.



<금산사 봉천원 추정지역 출토유물金山寺 奉天院 推定地域 出土遺物 고려, 수막새 지름 15, 금산사성보박물관>



금산사는 2007년 선방을 건립하기 위하여 고려시대 봉천원奉天院터를 발굴조사 하였다. 이곳에서 기와편 및 자기편, 배수시설 등이 출토되었다. 기단과 배수시설 사이에서는 ‘왕王’자명 수막새가 출토되었다. 이 막새기와는 고려 중기의 기와로 추정되는데, 막새면 전면에 귀면을 가득 새겼다. 미간에 작은 보주가 있고 치켜진 두 눈과 눈썹 위로 뿔을 새겼으며 그 안에 ‘왕’자를 양각하였다. 입은 좌우로 길게 벌어졌으며 입 사이로 송곳니가 드러나 있다. 이 유물들은 고려시대 봉천원을 조성했던 혜덕왕사 혹은 금산사지에 기록된 봉천원의 전각들 가운데 왕사각과 연관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 자비심으로 나라를 지켜내다

조선시대는 사찰을 줄이고 스님의 도성출입도 제한하는 등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을 시행하였고, 이로 인하여 불교계는 전반적으로 위축되었다. 도첩제를 더욱 강화하고 연소자의 출가를 금하였으며, 특히 불교종단을 7종에서 선교 양종으로 줄이고 각각 18개씩 36개 사찰만을 남겼다. 금산사는 태종대에 전라도 지역의 선종사찰에서 제외되었으며, 세종 대 선교양종의 지방 본산 사찰 18사에도 들지 못했다. 이처럼 금산사는 침체되었으나 1492년 세조의 서자 덕원군 이서李曙가 금산사를 불사한 기록이 있어 당시 왕실과 연관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선조 25년(1592)에 발발한 임진왜란은 7년에 걸쳐 조선의 국토를 황폐화시켰다. 많은 인명피해가 생기고 사찰과 문화재는 약탈당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한민족의 강인한 저항의식이 곳곳에서 의병의 봉기로 이어졌는데 출가자인 스님들도 각지에서 일어나 왜적과 싸웠다. 선조는 서산대사 휴정에게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의 직함을 제수하였고 서산대사의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전국에서 의승군이 일어나니 그 수가 5천이나 되었다.

 

호남지역 또한 의승군이 집결하였는데, 그 중심 사찰이 금산사였다. 호남의 의승군을 이끈 뇌묵 처영雷黙處英은 금산사에서 출가하였고 후에 묘향산으로 가서 서산대사에게 선종의 종지宗旨를 전수받았다. 뇌묵 처영은 사명 유정과 함께 서산대사의 2대 제자로 일컬어진다. 왜란이 일어나자 처영스님은 금산사를 중심으로 승병 1천여 명을 모아 전투에 참가하여 호남 승군의 총수로 서 많은 전과를 올리고, 권율과 행주대첩에 1천여 승군을 이끌고 참여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처영스님을 중심으로 화엄사, 대흥사, 백양사, 내장사 등의 스님들이 곳곳에서 일어나 왜적을 물리쳤다. 그 공로로 총섭의 지위를 받고, 후에는 ‘국일도대선사부종수교보광현랑뇌묵國一都大禪師扶宗樹敎葆光玄朗雷黙’이라는 법호를 받았다. 이 시기 조정에서 전국의 사찰 가운데 선교16종 규정소를 설치하였는데, 금산사는 전라우도 규정소로 지정되어 도내의 여러 사찰을 관할하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전라좌도와 전라우도를 관할하는 규정소로 확대되었다.


반면 소요 태능逍遙太能(1562-1649)스님은 스승인 청허 휴정 대사과 달리 임진왜란 때 적극적으로 참전하진 않았지만, 전쟁으로 폐허가 된 사찰과 불전을 수리하고 기도를 올리는 활동을 하였다. 또한 임진왜란 후에는 스님들을 동원하여 축성 역사에 종사하였다. 그는 편양 언기鞭羊彦機스님과 함께 2대 선승으로 추앙받았던 인물이며, 수백 명에 달하는 제자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이른바 ‘소요파’ 선문禪門의 개척자이다. 또한 호남 지방을 중심으로 수행과 제자를 양성하였다. 소요 태능의 법손은 조선 후기 대흥사를 선교의 종원宗院으로 격상시키는데 기여했던 종사와 강사들이다. 예를 들면 취여 삼우, 화악 문신, 설봉 회정스님은 대흥사 12종사이며, 연파 혜장스님은 12강사 중 1인이었다. 금산사에 <소요당혜감대사비逍遙堂慧鑑大師碑>가 세워졌다는 것은 소요 태능에게 금산사가 가장 중요한 도량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인조 13년(1635)에 이르러서야 금산사는 낙성을 보게 되었는데, 오늘날 우리가 보는 금산사 가람은 이때 복원된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금산사는 혜덕왕사의 중창 이후 대사구, 봉천원구, 광교원구의 세 구역으로 이루어진 대가람이었지만, 이 시기에 이루어진 중창은 대사구 지역만 한정되었다. 사찰 중건과 함께 당시 주지였던 지훈 스님과 간고 천택스님, 용면 응지스님 등이 주선하여 중관 해안스님으로 하여금 1635년 11월 『금산사사적』을 편찬하게 하였다. 현재 필사본으로 전하고 있는 『금산사사적』은 재건 공사와 함께 자료를 수집하여 작성한 것이다. 또한 조선 후기 금산사에는 호남불교의 중심 사찰이라는 위상에 걸맞는 스님들이 주석하였다. 대표적인 스님으로 백곡 처능 선사, 남악 태우 대사, 환성 지안대사 등을 들 수 있다.

 

백곡 처능白谷處能(1619-1680)선사는 불교가 그 명맥을 유지하기조차 힘겨웠던 조선 중기 불교 암흑기에 공식적으로 상소문 형식의 「간폐석교소諫廢釋敎疏」를 올려 배불정책에 대하여 부당성을 지적하고, 시정을 촉구하였다. 백곡 처능 선사는 부휴선사의 법계에 속하며, 벽암 각성의 법을 전수받았다. 선사는 현종 15년(1674) 김좌명의 주청으로 팔도선교도총섭八道禪敎都摠攝이 되어 남한산성에 머물렀으나 3개월 만에 사임하였다. 그 후 운수행각雲水行脚하며 속리산, 성주산, 청룡산, 계룡산 등지에서 산림법회를 열어 후학들을 지도하고 전법활동을 했다. 가장 오래 머물렀던 사찰은 대둔산의 안심사이며 숙종 6년(1680)에 모악산 금산사에서 5일간의 대법회를 개최하고 7월에 열반에 들었다. 금산사에는 백곡 처능 선사의 승탑을 모시고 있다.

이후 금산사의 중요한 사건은 환성 지안喚醒志安(1644-1729)이 영조 원년(1725) 금산사에서 화엄대법회를 열어 1,400여 명의 대중을 모았던 일이다. 당시에는 상상할 수 없는 대규모의 법회였다. 이때의 상황을 이조판서 홍계희洪啓禧가 지은 「환성대사비명喚惺大師碑銘」에서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스님은 1725년 금구의 금산사에서 화엄대법회를 개최하였는데, 이때 모인 대중이 무려 1,400여 인이었다. 스님은 당에 올라 불자를 세우고 대중들을 향해 법을 설하자 대중들이 모두 일찍이 경험하지 못했던 환희심을 내었다. 그런데 1729년 마침내 이 화엄대법회의 일로 모함이 들어가서 체포되어 호남의 옥에 갇히는 몸이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의 관리들이 고집을 부려 마침내 제주도로 유배를 가기에 이르렀다.

화엄대법회가 금산사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그 당시 금산사의 사격이 얼마나 높았는지를 보여준다. 이 법회는 당시 유림을 긴장시켰으며 환성 지안에 대한 탄압상소가 빗발쳤다. 이로 인하여 결국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7일 만에 입적하였다. 남악 태우南嶽泰宇(?-1732)스님은 환성 지안스님과 동시대의 스님으로 불교뿐만 아니라 유학에도 능통하여 시를 주고받으며 유학자들과도 교류하였다. 시의 표현에 능숙한 스님의 시는 『남악대사시집南嶽大師詩集』에 남아 있는데, 수행자의 특정한 경지뿐만 아니라 삶의 여러 애환도 잘 담겨있다고 평가받는다. 스님이 앉아서 입적入寂하자 서기가 나타나며 사리舍利가 나왔으므로 승탑을 금산金山에 세우고 비를 세웠다고 한다. 현재 금산사에 남악 태우 스님의 승탑이 전한다.

 

무경 자수의 기록과 함께 1865~1867년까지 김제에 머물렀던 소치 허련(小痴 許鍊)의 실경 금산사 전도가 남아있어 19세기 금산사의 모습을 살필 수 있다.


<금산사도, 허련 許鍊, 조선 19세기, 종이에 엷은 색 21×26.7 전북대학교 박물관>

<금산사도, 허련 許鍊, 조선 19세기, 종이에 엷은 색 21×26.7 전북대학교 박물관>




근현대 : 일제하 금산사의 수난과 극복

 

임진왜란의 위기를 극복하고 호남을 대표하는 명찰로 자리 잡은 금산사는 일제강점기에 또다시 위기를 겪었다. 1911년 일제가 사찰령을 시행하면서 금산사는 위봉사의 말사로 편입되어 사세가 크게 하락하였다. 그러나 1930년에 들어 위봉사와 보석사가 연합하여 전북 일본산주의一本山主義에 의거하여 금산사를 본산으로 지정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러한 양본산의 공동 사업은 금산사 사격 회복에 크게 도움을 주었다.


1935년 3월 큰 화재로 미륵전 본존불이 전소되었다. 당시 공모전라는 파격적인 방식(불모 일섭스님 등 당대 유명 작가 5인 응모)으로 진행되었는데 일본 동경대에서 수학하고 갓 돌아온 김복진씨가 당선되어 복원불사가 시행되었다. 김복진은 서양조각을 공부한 근대 조각가이다. 그는 새로운 재료인 석고를 이용하면서도 전통을 계승한 미륵대불을 완성하였다.


1961년에 금산사의 주지로 부임한 태공 월주 스님은 미륵전을 비롯하여 많은 불사를 이루었고 여러 스님들의 노력으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62년 조계종 통합종단이 만들어지면서 17교구의 본사로서 조계종의 종헌과 종지종풍을 따르고 있다.


1930년대 금산사 전경

(상단 왼쪽부터 금산사전경, 미륵전, 미륵삼존불(1935년 화재 전), 대적광전(화재 전), 대적광전 오여래육보살(화재전), 방등계단과 오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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