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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사의 스님들

신라 경덕왕(766년) 진표율사는 변산의 부사의방에서 망신참회법을 수행하여 미륵부처님의 수기를 받고, 미륵장육상을 모시고 미륵전을 지었다. 고려 문종 33년(1079) 혜덕왕사 소현 화상이 대사구와 봉천원구, 광교원구 등 총 88당 711칸의 대가람으로 중창하였고, 35부 353권의 불교전적을 판각하여 유통시킴으로써 유가종찰과 미륵성지의 위상을 격상시켰다. 조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뇌묵 처영대사는 천여명의 의승군을 모집하여 직접 전투를 지휘하여 왜군을 격퇴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인조 13년(1635) 수문대사는 지훈, 덕행, 천성, 응원, 학련, 대전, 운근 등 15명의 화상과 함께 35년간에 걸쳐 대적광전과 미륵전, 대장전 등 대사구역을 복원하여 오늘의 금산사를 있게 했다. 1961년 태공 월주 스님이 주지로 부임한 후 도영, 도법, 평상, 원행, 성우, 일원 등 도제스님들과 미륵전을 전면해체 보수하는 등 30여 당우들을 새로 짓거나 개축하여 금산사를 새로 정비했다. 미륵십선운동, 깨달음의 사회화운동, 세계일화의 실천 도량인 (사)지구촌공생회를 설립하여 자비의 보살행을 몸소 실천하고 있다.


금산사를 빛낸 역대 조사 


중창주 진표율사

진표율사는 신라 경덕왕 대에 활동한 스님으로 사실상 금산사의 창건주라고 할 수 있다. 진표율사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진표전간眞表傳簡」과 「관동풍악발연수석기關東楓嶽鉢淵藪石記」, 『속고승전續高僧傳』 등에 비교적 상세하게 남아 있다. 진표율사는 완산주 만경현 출신으로 아버지는 진내말眞乃末, 어머니는 길보랑吉寶娘이다. 12세에 출가의 뜻을 품고 유명한 스승을 찾아 나섰다. 그리하여 금산사의 숭제법사에게 출가하였다. 


출가 이후 진표율사는 끝이 없는 수행에 들었다. 특히 ‘율사’라는 존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계戒를 매우 중시하였고, 계법戒法을 얻기 위해 철저한 수행을 하였다. 자신의 몸을 버리는 망신참법亡身懺法을 행한 진표율사는 지장보살로부터 정계淨戒를 받았지만 수행을 멈추지 않고 계속하였다. 마침내 미륵보살의 현신으로부터 『점찰선악업보경占察善惡業報經』 두 권과 189개의 간자簡子를 받고 하산하였다.


대연진大淵津에 이르렀을 때 용왕龍王이 나타나 진표율사에게 옥으로 된 가사를 바쳤다. 스님은 용왕이 거느린 8만 권속의 호위를 받으며 금산사에 이르렀다. 사방에서 바람들이 모여들어 며칠 만에 절이 완성되었다. 또 미륵이 도솔천兜率天에서 감응하여 구름을 타고 내려와서 스님께 계법戒法을 주니 스님은 사람들에게 권하여 미륵장륙상彌勒丈六像을 만들게 했다. 또 미륵보살이 내려와서 계법을 주던 모양을 금당金堂 남쪽 벽에 그렸다. 갑진년(764) 6월 9일에 주성하여 병오년(766) 5월 1일에 금당에 안치하니 이 해가 대력大曆 원년(766)이었다. 이후 진표율사는 속리산 법주사法住寺를 중창하고 이어 금강산 발연사鉢淵寺를 개창하였다. 


진표율사는 대중 교화에도 힘썼다. 특히 점찰법占察法을 행한 점찰법회를 자주 열었다. 점찰법이란 『점찰선악업보경』에 의거하여 나무로 깎아 만든 목륜木輪 간자를 굴려서 나타난 모양으로 점을 치는 것이다. 점찰법으로 전생에 지은 죄를 알고 이를 참회하고자 하였다. 진표율사는 미륵보살로부터 받은 189개의 간자로 점찰법을 시행했으며, 이를 통한 참회를 수행법으로 제시하였다. 점찰법을 통한 수행은 대중들에게 미륵신앙을 널리 전파하는 방편이 되기도 하였다.

『삼국유사三國遺事』「진표전간眞表傳簡」과 「관동풍악발연수석기關東楓岳鉢淵藪石記」에 진표율사의 행적이 전한다. 「진표전간」에는 진표율사가 출가하여 수행 끝에 미륵으로부터 『점찰경占察經』 2권과 간자 189개를 받았다는 내용과 금산사에서 법시法施를 베풀고 왕실의 후원을 받은 일과 진표율사의 제자들을 열거하였다. 「관동풍악발연수석기」에는 스님이 지장보살과 미륵보살로부터 계법戒法을 받은 것과 금산사를 창건하고 사람들을 교화한 이야기, 금강산 발연사를 세우고 점찰법회를 연 내용이 전한다.




혜덕왕사

 


혜덕왕사(慧德王師) 소현(韶顯, 1038~1095)은 고려시대의 고승으로 속성이 이씨(李氏)이며, 1038년(정종 4) 7월 3일 개성의 남쪽 불령리에서 중서령 이자연(李子淵)의 아들로 태어났다. 속명은 민(民)이고 자는 범위(範圍), 소현은 법명이다. 11세 때 출가하여 진표율사의 법상종을 계승한 지광국사智光國師 해린海麟국사의 제자가 되었다. 소현은 출가 후 해린에게서 『금광명경』과 『유식론」 등을 배우면서 법상종을 익혀나갔다. 12세 때 부흥사(復興寺)에서 구족계를 받았고, 1061년(문종 15년) 왕륜사에서 열린 오교대선장(五敎大選場)에서 대덕(大德)의 칭호를 받았다. 고려문종의 아들인 대각국사 의천의 스승이다.


1079년 금산사의 주지로 부임하면서 진표율사의 중건 이래 가장 큰 규모로 금산사를 중창하였다. 가람의 남쪽에 광교원을 설립하여 『법화현찬法華玄贊』, 『유식술기唯識述記』 등을 비롯한 장소章疏 32부 353권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1096년 12월 18일 금산사의 봉천원에서 입적하였다. 숙종은 혜덕왕사라는 시호를 내렸고, 탑호를 진응眞應이라 하여 탑비를 세웠다. 글씨는 구양순법의 해서로 썼다. 


비문은 마모가 심하여 알아보기 어렵지만 당시 대표적인 문벌가인 인주이씨仁州李氏 자연李子淵의 아들로서 왕사의 가계와 탄생 그리고 출가와 수행을 서술하고, 금산사에 광교원을 설치하여 유식 전적을 간행한 사실과 입적 후 재를 지낸 경비를 조정에서 지원한 내용이다. 그리고 음기記에는 왕사의 문도를 열거하였는데 승통僧統, 수좌首座, 삼중대사三重大師, 중대사重大師, 대사大師로 나누어 인명을 열거한 자가 110여 명이고 언급된 인명은 1천8백여 명에 이른다. 이 비의 음기는 고려시대 스님의 문도를 성격에 따라 구분한 예를 보여주는 좋은 자료이다.




도생승통

 

도생승통의 이름은 규(窺)이며, 고려 문종(文宗, 1046~1083)의 여섯 째 아들이다. 같은 시대를 활약했던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 1055~1101)은 바로 스님의 친형이며, 문종의 넷째 왕자(王子)였다. 


고려시대 불교는 융성을 거듭하여 이미 이 시기에는 아들이 셋 이상 있는 집에는 한 아들을 출가시킬 정도로 불교에 대한 관심도가 높았다. 의천(義天)이 득도한 것은 문종 19년(1065)이었고 그때 나이가 11세였다. 도생(導生)이 득도한 것은 문종 23년(1069)이었다. 아마 어려서 출가했으리라 짐작된다. 


문종은 스님의 출가 의사를 확인하고 연덕궁(延德宮)으로 혜덕왕사(慧德王師)를 맞아들여 계를 받고 득도하도록 하였다. 스님은 오랫동안 법주사(法住寺) 주지직을 맡았다. 그러다 숙종 원년(1095) 혜덕왕사가 돌아가시자 금산사의 주지직을 겸임하게 된 것이다. 스님의 행적이나 만년에 대한 별다른 기록이 없다. 다만 스님이 통상 승통(僧統)으로 불리어졌고 금산사를 중창했다고 전해올 따름이다. 고려시대 승통은 교종의 최고 법계이므로 도생승통은 당시 최고의 지위까지 오른 스님이었다.

이 문집은 고려 초기 대각국사 의천의 시문집으로 『대각국사문집』 20권과 『대각국사외집大覺國師外集』 13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각국사문집』에는 서序·기記·표表·사辭·장狀·서書·소문疏文·제문祭文·진찬眞讚·시문示文·시詩 등이 수록되어 있으며, 『외집』에는 편지글, 기記, 시詩, 비명碑銘 등이 있다. 권19에는 대각국사가 도생 승통이 속리사에 돌아가는 것을 전송하며 지은 시가 전한다.




원명해원

 

혜덕왕사 이후 금산사를 중창한 분이 원명 해원(圓明海圓 1262~1330)스님이다. 스님은 고려 말 원나라에서 유학하여 유식학과 계율로 크게 이름을 떨쳤으며 유가학승(瑜伽學僧)으로서 묘탑과 비석이 중국 숭은복원사(崇恩福元寺)에 전한다. 속성은 조(趙)씨로 완산주 함열군에서 대호군 조혁(趙奕)의 이들로 태어나 12세에 금산사의 석굉(釋肱)법사 문하에서 출가했다. 1294년(충렬왕 20)에 승과고시인 오교대선에 응시하여 상상과(上上科)에 합격한 후 불주사(佛住寺)의 주지를 맡았다.
l305년에는 원나라 안서왕(安西王)이 스님의 계행이 매우 높다는 말을 듣고 사신을 보내 초빙했다. 1311년(충선왕 3) 원나라 무제(武帝)의 원찰로서 숭은복원사가 창건되었다. 원나라 인종은 중국의 여러 고승을 제쳐두고 스님을 초대 주지로 임명하였고, 이후 스님은 원 황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게 되었다. 한편 스님의 명성은 되돌아 고려 국내에 자자하게 알려졌고, 이에 충숙왕은 1328년(충숙왕15) 원 황제에게 서신을 보내 스님을 돌려보내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에 스님은 충숙왕에게서 혜감원명편조무애국일대사(慧鑑圓明遍照無碍國一大師)라는 법호를 받고 귀국하여 금산사에 머물며 절을 중창하였던 것이다.

스님은 마음가짐이 관대하고 온화하였으며, 몸가짐은 위엄이 있어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특히 유식학의 교의에 통달하여 많은 사람들과 논쟁을 펼쳤는데 그 때마다 사람들을 설복시켰다.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는 천하고 귀함을 가리지 않았고, 한마음으로 맞으니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제자들에게는 향상 백성의 힘으로 이룩된 도량에서 사치와 음식을 탐하는 것은 어리석음이 아니면 미친 짓이라고 가르쳤다고 한다.

<가정집 가정집 稼亭集일제강점기 

1939년27×18.6 국립중앙도서관>

『가정집稼亭集』은 고려 후기 학자 이곡李穀(1298-1351)의 시문집이다. 이곡은 36세에 원나라 제과制科에 등제하여 이후 고려와 원의 관직을 제수除授받았다. 고려와 원을 넘나들며 문인, 스님들과 교류하였다. 그의 문집에도 다채로운 내용이 들어있다. 고려와 원, 두 나라의 사회·문화를 포괄하고 있어 사료적 가치가 높다.『가정집』 권6에는 혜덕왕사 이후 금산사를 크게 중창한 원명 해원圓明 海圓(1262-1330)의 「대숭은복원사고려제일대사원공비大崇恩福元寺高麗第一代師圓公碑」 비문이 수록되어 있다. 

원명 해원은 12세에 금산사에서 출가하였다. 1305년에는 원나라 안서왕安西王의 초청으로 원나라에 건너갔으며 1312년 숭은복원사崇恩福元寺가 창건되자 숭은 복원사의 첫 번째 주지가 되었다. 1328년 충숙왕이 금산사에 주지할 것을 청하자 귀국하여 금산사에 주석하고 금산사를 중창하였다.




소요태능


스님의 법명은 태능(太能), 법호는 소요(逍遙)이며 성은 오(吳)씨이고 본관은 담양(潭陽)이다. 조선 명종 l7년(嘉靖41, 1562) 임술 9월에 태어 났다. 13세 되던 해 백양산(白羊山)에 놀러갔다가 물외(物外 : 物外庵)의 선경(仙境)을 보고 느낀 바 있어 출진(出塵)을 결심, 진(眞) 스님을 쫓아 머리 깎고 경률(經律)을 익혀 그 뜻에 통달하였다. 


태능은 또 휴정(休靜) 대사가 묘향산에서 선풍(禪風)을 크게 진작시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를 묻는다. 휴정은 한번 보매 태능을 법기(法器)라 여기고 제자로 받아들였다. 태능스님은 휴정대사의 회상에서 3년여 선(禪)을 참구한 끝에 스승의 명에 따라 당(堂)을 열고 법화(法化)를 편다. 이때의 나이 20세였다. 


서산의 제자 중에서 태능스님은 편양(鞭羊)스님과 함께 선(禪)의 두 우두머리로 추앙되었으며 뒤에 태능스님의 문하가 일파를 이루니 소요파(逍遙派)라고 불리웠다. 태능스님으로부터 선종(禪宗)을 이은 이는 침굉 현변(枕肱 懸辯)스님이고, 교종(敎宗)을 전수받은 사람은 해운경열(海運 敬悅)스님이며 전법(傳法)제자만도 30여 명에 이른다. 현재 금산사에 비석이 있는데,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이 비석 글을 지었다. 보개산 심원사(深源寺), 지리산 연곡사(燕谷寺), 두륜산 대둔사(大芚寺)에 부도(浮屠)가 있다. 효종이 ‘혜감(慧鑑)선사’ 라는 시호를 내렸다.


<소요당대사비, 조선 1651년, 높이 296>



<소요집, 일제강점기 1920년 반곽 17.2×11.7 동국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요당대사비 逍遙堂大師碑는 효종 2년(1651)에 건립된 소요 태능逍遙太能(1562-1649)의 비이다. 효종이 혜감선사慧鑑禪師라 시호를 내리고 금산사에 비를 세우도록 하였다. 이경석李景奭(1595-1671)이 비문을 찬하고, 조진석趙晋錫(1610-1654)이 글씨와 전액을 담당하였고 글씨는 해서楷書로 썼다. 13세 때 출가하여 부휴浮休의 문하에서 배운 뒤 사명대사 문하에 들어 그의 법을 받았다. 편양 언기鞭羊彦機와 함께 사명대사의 가르침을 이은 2대 선승으로 추앙받았으며, 양대 법맥(편양파와 소요문파)을 이루었다. 소요 태능과 금산사의 관계에 대해서는 자세한 내용이 전하지 않지만, 스님의 입적 후 금산사에 비가 세워졌다는 사실로 볼 때 금산사는 스님에게 있어 중요한 도량이었음을 알 수 있다.

 『소요당집逍遙堂集』은 서산대사의 제자인 소요 태능스님의 문집이다. 스님의 입적 후 약 150년 뒤인 정조 24년(1800)에 태능스님의 6대 법손인 춘담春潭 스님이 시 200여 수를 모아 담양 옥천사玉泉寺에서 간행하였다. 책에 수록된 시는 대부분 선의 세계를 음미한 것이며, 가까운 스님이나 선비들과 주고받은 시도 일부 수록되어 있다. 이들 시 이외에도 「용추사법당중창기龍湫寺法堂重創記」 1편이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은 1920년에 간행한 신문관新文館 연인본鉛印本이다.




뇌묵 처영대사


조선시대는 사찰을 줄이고 스님의 도성출입도 제한하는 등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을 시행했다.  이로 인하여 불교계는 전반적으로 위축되었다. 도첩제를 더욱 강화하고 연소자의 출가를 금하였으며, 특히 불교종단을 7종에서 선교 양종으로 줄이고 각각 18개씩 36개 사찰만을 남겼다. 금산사는 태종 대에 전라도 지역의 선종사찰에서 제외되었으며, 세종 대 선교양종의 지방 본산 사찰 18사에도 들지 못했다. 이처럼 금산사는 침체되었으나 1492년 세조의 서자 덕원군 이서李曙가 금산사를 불사한 기록이 있어 당시 왕실과 연관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선조 25년(1592)에 발발한 임진왜란은 7년에 걸쳐 조선의 국토를 황폐화시켰다. 많은 인명피해가 생기고 사찰과 문화재는 약탈당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한민족의 강인한 저항의식이 곳곳에서 의병의 봉기로 이어졌는데 출가자인 스님들도 각지에서 일어나 왜적과 싸웠다. 선조는 서산대사 휴정에게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의 직함을 제수하였고 서산대사의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전국에서 의승군이 일어나니 그 수가 5천이나 되었다. 호남지역 또한 의승군이 집결하였는데, 그 중심 사찰이 금산사였다. 


호남의 의승군을 이끈 뇌묵 처영雷黙處英은 금산사에서 출가하였고 후에 묘향산으로 가서 서산대사에게 선종의 종지宗旨를 전수받았다. 뇌묵 처영대사는 사명 유정대사와 함께 서산대사의 2대 제자로 일컬어진다. 왜란이 일어나자 처영스님은 금산사를 중심으로 승병 1천여 명을 모아 전투에 참가하여 호남 승군의 총수로서 많은 전과를 올리고, 권율과 행주대첩에 1천여 승군을 이끌고 참여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처영스님을 중심으로 화엄사, 대흥사, 백양사, 내장사 등의 스님들이 곳곳에서 일어나 왜적을 물리쳤다. 그 공로로 총섭의 지위를 받고, 후에는 ‘국일도대선사부종수교보광현랑뇌묵國一都大禪師扶宗樹敎葆光玄朗雷黙’이라는 법호를 받았다. 이 시기 조정에서 전국의 사찰 가운데 선교16종 규정소를 설치하였는데, 금산사는 전라우도 규정소로 지정되어 도내의 여러 사찰을 관할하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전라좌도와 전라우도를 관할하는 규정소로 확대되었다.


뇌묵대사 처영은 서산대사 휴정, 사명대사 유정, 기허대사 영규와 함께 조선시대 대표적인 의승장으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묘향산妙香山 수충사酬忠祠에는 휴정, 유정, 처영 세 분의 의승장이 함께 배향配享되어 있어, 의승장으로서의 위상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뇌묵대사는 권율權慄 장군과 함께 행주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다. 등받이가 높은 의자에 앉은 뇌묵대사는 왼손에 용머리와 영락으로 장식된 불자를 들고 오른손에는 염주를 쥐고 있다. 화면 왼쪽의 상단에 뇌묵대화상진雷默大和尙真이라 영제影題를 썼다.

뇌묵대사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어 스님의 행장行狀은 물론이고, 생몰년도 알려져 있지 않다. 다행히 임진왜란 때 뇌묵대사의 활약이 『난중잡록』에 언급되어 있어 뇌묵대사의 의승군 활동을 일부나마 확인할 수 있다. 『난중잡록』은 남원 출신의 의병장 조경남趙慶男(1570-1641)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대해 기록한 것이다. 선조 15년(1582)부터 왜란의 정국이 일단 정리되는 광해군 2년(1610)년까지의 본편과 병자호란을 중심으로 다룬 『속잡록續雜錄』으로 구성되어 있다. 조경남 자신이 의병장으로 활동한 사실뿐 아니라 당시 나라 전체의 역사적 상황과 풍속을 상세히 기록하여 당시의 사회전반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선조수정실록』이 편찬될 때에 조정에서 원본을 빌려가 참고할 정도로 당시에 이미 역사성을 인정받았다.


<뇌묵대사 처영 진영, 조선후기,
원광대학교 박물관>

<교룡산성승장동인, 조선 1592년 혹은 1593년 7.8×6.3×6.5 

전라북도 민속문화재 제27호>


이 승장인僧將印은 뇌묵 처영에게 하사한 것으로 구리로 만든 도장이다. 뇌묵대사는 행주대첩 이후 교룡산성蛟龍山城 수축을 명받아 남원으로 이동하였다. 교룡산성의 승병장이 된 후 7개월 만에 성을 크게 수축하여 호남 방어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산성별장山城別將임을 증명하는 의미로 이 도장을 새겨 보낸 것이다. 도장은 산성 내의 선국사善國寺 주지에게 대대로 전해 내려오다, 동학혁명군 김개남金開南이 교룡산성을 본거지로 활동할 때 유실한 것을 1960년 당시의 주지였던 보월寶月스님이 보제루普齊樓 마루 밑에서 발견했다고 전한다.



수문대사

 

조선 초기에는 왕실이나 사대부의 아녀자들을 중심으로 불교가 신봉되어지기도 하였으나 불교는 점차 쇠퇴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조선중기 이후로는 민중불교가 되어 민중에 의해 신행되었다. 이러한 때에 민간신앙으로 전해지던 불교신앙은 억불숭유정책에 의한 불교의 탄압으로 사찰과 불상 그리고 많은 불교문화재가 변란을 당하는 과정에서 백성들과 더욱 밀접한 관계가 되어 신봉되어진다.

임진왜란 때 금산사 주지로 계시던 뇌묵 처영대사가 승병 훈련소를 설치하여 왜군들에게 조직적으로 대항하였다. 그러나 정유재란 때에 왜군들이 금산사에 들이닥쳐 신라 혜공왕 때 세워진 미륵전과 혜덕왕사에 의해 크게 중창되었던 86채의 전각들을 모두 불태워 버려 금산사는 진표율사가 봉안한 미륵장륙상 철제 대좌를 빼고는 모두 소실되었다. 그 후 조선 인조13년(1635년)에 수문대사와 지훈, 덕행, 천성, 응원, 학련, 대전, 운근 등 15명의 화상에 의해 35년간 금산사는 새롭게 태어나게 된다. 당시 2개의 불전형(佛典形)으로 다시 중창 되었는데 대적광전을 중심으로 한 화엄신앙이 그 하나이고, 삼층 미륵전을 중심으로 하는 미륵신앙이 그것이다. 이 두 개의 불전은 남과 북 그리고 동과 서를 가르며 교차되게 건립되어졌다.

'삼층장육전' '미륵수계전' 등은 미륵전이라는 삼층 건물로 통합하여 만들어졌으나 1930년도에 이교도들의 방화에 의해 미륵장륙상이 크게 훼손되었고 이를 1937년도에 다시 복원하였고 그후 1993년에 이르러 완전 해체하여 보수공사를 완료하였다. 그리고 수문대사에 의해 화엄신앙과 아미타신앙, 약사신앙, 나한신앙이 한곳에 모여 `대적광전'이라는 명칭 아래 하나의 법당으로 건립되어졌으나 1986년 원인 모를 화재에 소실되고 태공 월주스님에 의해 대적광전과 나한전으로 따로 재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환성지안


스님의 성씨는 정(鄭)씨로서 춘천 사렴이며 조선조 현종 5년(康熙 3, 1664)에 태어났다. 15세에 미지산(彌智山) 용문사(龍門寺)로 출가하여 머리 깎고 쌍봉 정원(雙峰淨源)에게 구족계를 받은 뒤 17세 되던 해에 편양 문손인 월담 설제月潭雪霽(1632-1704)에게 가르침을 구했다. 

월담은 한눈에 환성의 그릇 됨됨이가 범상치 않음을 알아차리고 마침내 의발(衣鉢)을 환성스님에게 전해준다. 헌헌장부로 성장한 환성은 용모부터 특이하여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골격이 말쑥하고 엄숙하였으며 음성은 맑고 그윽하여 신비감을 자아냈다. 말은 조리가 분명하고 군더더기가 없이 간결하였으며 얼굴 빛 역시 늘 온화함을 잃지 않았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담긴 경전(經典)들을 깊이 연구하느라 침식(寢食)을 잊기 예사였다. 27세 되던 해에 환성은 모운진언(幕雲震言) 대사가 금산(金山: 금릉)의 직지사(直指寺)에서 법회를 개설한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간다. 모운(1622~1703)은 부휴(浮休)의 고재(高弟) 벽암(碧岩)의 제자로 당시 삼남(三南)에 이름을 떨치던 화엄의 대종장(大宗匠)이었다. 모운대사는 환성을 보자 크게 기뻐하며 비록 자신보다 20여 년 연하(年下)의 선지식이었지만 그를 공경해마지 않았다. 모운대사는 대중 수백 인이 모인 자리에서 환성스님에게 강석(講席)을 물려주며 고별 법어를 마치고 “내 이제 사자좌를 거두고 떠나노니 너희들은 스승의 예로써 이 스님을 섬기도록 하라.”는 당부의 말을 남긴 뒤 남모르게 훌쩍 떠나버렸다.


모운대사가 강석(講席)을 물려주고 다른 산으로 떠난 뒤 환성스님은 대중들의 간곡한 청에 못 이겨 마침내 설법을 시작하였다. 종으로 횡으로 주도면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치 강물이 쏟아져 내리듯 거침없는 환성의 설법에 대중들은 막혔던 가슴이 뚫리듯 시원하게 의문점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모운 진언대사로부터 강석을 물려받아 당시의 대강백이 된 환성 지안대사는 영조 1년(乙巳, 1725) 금산사(金山寺)에서 화엄대법회를 여니 1천4백 명의 대중들이 참석하여 대성황을 이루었다.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이 역사적 집회는 당시 조정을 긴장케 함으로써 뒷날 환성대사가 귀양 가서 죽도록 하는 비극의 불씨가 된다. 환성대사의 고난은 개인적 고난이 아니라 당시 혹독한 탄압을 받고 있던 불교 전체의 고난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제주도에 유배된 지 7일째 되던 7월 7일, 환성대사는 중생구제를 위한 원대한 서원(誓願)을 펴보지 못한 채 흘연 열반에 든다. 누려온 나이 66세, 법랍 51세였다. 환성대사의 열반은 곧 국가적 손실이라는 것을 시사하는 듯한 사건이 속출하였다. 3일 동안 한라산이 울고 바닷물이 끓어오르는 등 이변을 보이자 제주도 사람들은 환성대사를 삼성(三聖)의 예언에 나오는 바로 그분이라고 단정하였다.


환성당 지안 진영 喚醒堂 志安 眞影(1664-1729)은 뒷면에 제찬과 제작연대가 적혀 있어 가경 4년(1799) 여름에 옥인玉仁이 그렸음을 알 수 있다. 화면 중앙에 위치한 스님은 의자에 앉아 우측을 바라보았다. 왼손에는 금빛의 용머리 장식이 있는 불자를 세워 들고 오른손으로는 불자의 수술을 가볍게 쥐고 있다. 의자 등받이 좌우 끝에도 용머리 장식이 있고 등받이 부분은 금문양이 있는 녹색 천이 드리워져 있다.『선문오종강요禪門五宗綱要』는 숙종 15년(1689)에 환성지안이 선종오가의 강요를 여러 문헌들에서 발췌하여 편집한 책이다. 북해 함월北海涵月이 쓴 서문에 의하면, 오가五家, 즉 임제종臨濟宗·운문종雲門宗·조동종曹洞宗·위앙종潙仰宗·법안종法眼宗의 사상이 여러 문헌에 산재해 있어 살피기 어려우므로 환성 지안이 문헌 속의 요의要義를 채집하여 편찬하였으며, 자신이 틀린 부분을 교정하고 빠진 것을 보충하였다고 한다. 함경도 안변 석왕사釋王寺에서 간행되었다.


<환성 지안 진영, 조선 1799년, 비단에 색 122×81.7 

통도사성보박물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50-3호)>

<선문오종강요 禪門五宗綱要>

<환성시집 喚醒詩集>


환성시집 喚醒詩集은 환성 지안의 시문집이다. 지안은 자가 삼낙三諾, 호가 환성喚醒이며, 월담 설제月潭雪霽의 법을 받았다. 이 시집은 1권1책의 목판본이며 내용은 모두가 시이다. 권두에 오봉鼇峰의 서序가 있고 권말에 해원海源이 찬한 행장이 있다. 오언절구 59수, 칠언절구 61수, 오언율시 16수, 칠언율시 10수, 끝에는 호암虎岩과 풍담楓潭의 임종게臨終偈 3수 등이 수록되어 있다. 영조 27년(1751) 안변 석왕사釋王寺에서 개판하였다. 이들 시는 모두 선의 경지에서 속세의 먼지가 탈락된 정신세계를 음미한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스님의 시문집이 많지만 선시禪詩로서는 이 시를 능가하는 것을 찾아보기 어렵다.




용명당 각민대사

 

용명당 각민대사는 1846년(조선헌종 朝鮮憲宗 12年) 8월 9일 전주에서 아버지 동래정씨 석노와 어머니 청송 심씨 사이에서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약관의 나이에 영주 정토사 지진장노(智眞長老)에게 출가(出家)하여 승려가 되었다. 조선 말(朝鮮末) 국내외 사정이 매우 혼란할 때 대사는 금산사 주지로 재직하는 동안 안으로는 금산사의 가람수호를 위해서, 그리고 밖으로는 호남 도승통(都僧統)을 이곳 금산사에 두어 호남지역 전체의 불교발전을 도모하는 등 그의 열과 성의를 다하였다.


그 무렵 인근 지역에는 금광의 불법채굴이 크게 유행하였다. 1900년 대한제국(大韓帝國) 광무(光武 4年)에는 금산사 사리탑 아래까지 채광(採鑛)을 하고자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대사는 지방판서(地方判書)와 서울의 중앙내자원(中央內臟院)에 경내의 불법 채광에 대한 그 부당성을 널리 알리고 진정(陳情)을 올리는 등 혼신의 노력으로 가람을 수호하고자 하였다. 마침내 1901년(光武 5年) 12월 말에도 공식적으로 불법 채광 금지령이 내려졌음에도 불구하고 1902년(光武 6年) 1월 1일 금산사로 모여 크게 소란을 피우면서 채광을 계속하려고 하였다. 대사는 이 소란꾼들의 손에 의해서 현재의 경내 가운데 잣나무 아래에서 57세의 나이로 불의에 입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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