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 모악산 금산사를 후백제 견훤왕의 원찰(願刹)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그동안 금산사가 아들 신검에 의해 유폐된 견훤왕의 비극적인 공간으로 인식돼왔지만 미륵사상을 중심으로 다른 시각에서 조명한 학술대회가 열렸다.
이같은 견해는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원장 정덕스님)이 전라문화유산연구원(원장 김미란)이 11월24일부터 이틀간 제17교구본사 금산사 처영기념관에서 개최한 ‘후백제 불교와 김제 금산사 학술대회’에서 제기됐다.
이날 송화섭 전 중앙대 교수(전 후백제학회장)은 ‘후백제 견훤대왕과 금산사’라는 주제발표에서 “견훤왕은 미륵신앙 신봉주의자로 익산 금마산 백제 건국설은 백제 역사와 사상을 잇겠다는 구상에서 나온 것”이라며 “견훤왕은 금산사에서 발원한 진표율사의 미륵사상을 그대로 수용한 듯하다”고 강조했다. 견훤왕이 백제시대 익산 미륵사에서 통일신라시대 금산사까지 계승된 미륵하생 신앙을 실천해 중생을 구제하고 용화세계를 실현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송화섭 교수는 “견훤왕의 신념은 금산사 방등계단과 홍예문 조성에서 확인해볼 수 있다”며 “후백제 국운융성기에 견훤왕이 금산사를 원찰(願刹)로 조성하면서 홍예문을 축조한 것으로, 왕을 유폐할 목적에서 세운 것으로 볼 수 없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홍예문 축조 연대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며 견훤왕이 자주 왕래한 원찰로 보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와 더불어 송화섭 전 회장은 금산산 방등계단의 오층석탑이 기단부는 통일신라시대, 탑신은 고려 초 양식이라고 설명한 뒤 “견훤왕이 신검에게 왕위를 승계할 즈음에 금산사에서 여생을 마칠 목적에서 극락왕생을 서원하는 마음으로 세운 것으로 보인다”고 추정했다. 이어 “금산사는 후백제 왕실의 원찰(願刹)이었을 것”이라며 “견훤왕은 노후에 금산사에서 기거할 계획을 세우고 극락왕생을 서원하기 위해 방등계단에 5층 석탑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고 거듭 강조했다. 학술대회에서는 방등계단 5층 석탑 조성시기에 대한 다른 의견이 제기되기도 했다.
최연식 동국대 사학과 교수는 ‘후백제 견훤과 불교계의 관계’라는 주제발표에서 “금산사가 견훤의 원찰이라는 주장에 동의한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금산사는 견훤이 창건(=중창)한 사실이 확인되는 유일한 사찰이라는 점에서 견훤이 특별히 중시한 사찰”이라는 것이다.
이어 최연식 교수는 “아들 신검이 왕위를 찬탈한 후에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한 것도 이곳이 왕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라며 “왕위를 찬탈하기는 했지만 부왕을 존숭해야 하는 입장에서 부왕이 평소 자주 방문해 편안해할 수 있는 곳을 골랐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또한 최연식 교수는 “견훤과 불교계의 관계에 대해서는 해인사 화엄학승 관혜(觀惠)스님과 중국 유학에서 돌아온 선승 경보(慶甫)스님을 지원하려 했다는 사실이 고려 초 기록에 보이지만 단편적 언급에 그쳐 자세한 상황은 알기 어렵다”면서 “그 밖의 후백제 내부의 주요 고승들의 행적이나 주요 사찰 건립과 같은 불교계 동향에 관해서는 관련 기록이 전무한 형편”이라고 밝혔다.
다만 견훤이 후삼국 시기 화엄종 승려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사실이 균여(均如, 923~973) 스님의 전기 중에 보이고 있다고 했다. 이 기록에는 “옛날 신라 말기에 가야산 해인사 두 분의 화엄학 종장이 계셨다. 한 분은 관혜(觀惠) 스님으로 (후)백제 우두머리 견훤의 복전(福田)이셨고”라고 기술돼 있다,
이밖에 학술대회에서는 △후백제 불교조각 연구의 새로운 모색(최성은 덕성여대 명예교수) △후백제의 정체성 변화와 불교미술(진정환 국립익산박물관 학예연구관) △금산사 주변 산성과 후백제(조명일 군산대 가야문화연구소 책임연구원) △금산사 계단의 연대와 <기원도경> <계단도경>과의 관련성(이진영, 일본 도시사대학 강사) △김제 금산사 석조미술의 특징과 의의(엄기표 단국대 교수) △금산사의 건축문화(도윤수 동국대 불교학술원 문화유산팀장) △근현대 김제불교와 금산사(문광스님, 동국대 불교학술원 HK연구교수) 등 다양한 논문이 발표됐다.
첫날 학술대회를 마치면서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장 정덕스님은 “연구자들이 정성이 깃든 연구결과를 발표해주어 성공적이고 풍성한 학술대회가 됐다”면서 ”계속 발전시켜 나가면 앞으로 커다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총평을 했다.
학술대회 둘째 날인 11월 25일에는 오전 10시부터 금산사 처영기념관에서 △후백제의 조각과 불교미술 △금산사의 석조유물과 건축문화를 주제로 심층토론과 종합토론이 이뤄졌다. 최연식 동국대 교수가 좌장을 맡은 토론에는 엄기표 단국대 교수, 도윤수 동국대 불교학술원 문화유산팀장, 최성은 덕성여대 명예교수, 진정환 국립익산박물관 학예연구관이 참석했다.
김성욱 김제시청 학예연구사는 “(김제시에서는) 후백제 역사 문화권과 관련해 전북도와 함께 역사문화권 관련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면서 “김제시는 후백제의 정신적 중심지로의 금산사 역할을 중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제 모악산 금산사를 후백제 견훤왕의 원찰(願刹)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그동안 금산사가 아들 신검에 의해 유폐된 견훤왕의 비극적인 공간으로 인식돼왔지만 미륵사상을 중심으로 다른 시각에서 조명한 학술대회가 열렸다.
이같은 견해는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원장 정덕스님)이 전라문화유산연구원(원장 김미란)이 11월24일부터 이틀간 제17교구본사 금산사 처영기념관에서 개최한 ‘후백제 불교와 김제 금산사 학술대회’에서 제기됐다.
이날 송화섭 전 중앙대 교수(전 후백제학회장)은 ‘후백제 견훤대왕과 금산사’라는 주제발표에서 “견훤왕은 미륵신앙 신봉주의자로 익산 금마산 백제 건국설은 백제 역사와 사상을 잇겠다는 구상에서 나온 것”이라며 “견훤왕은 금산사에서 발원한 진표율사의 미륵사상을 그대로 수용한 듯하다”고 강조했다. 견훤왕이 백제시대 익산 미륵사에서 통일신라시대 금산사까지 계승된 미륵하생 신앙을 실천해 중생을 구제하고 용화세계를 실현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송화섭 교수는 “견훤왕의 신념은 금산사 방등계단과 홍예문 조성에서 확인해볼 수 있다”며 “후백제 국운융성기에 견훤왕이 금산사를 원찰(願刹)로 조성하면서 홍예문을 축조한 것으로, 왕을 유폐할 목적에서 세운 것으로 볼 수 없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홍예문 축조 연대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며 견훤왕이 자주 왕래한 원찰로 보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와 더불어 송화섭 전 회장은 금산산 방등계단의 오층석탑이 기단부는 통일신라시대, 탑신은 고려 초 양식이라고 설명한 뒤 “견훤왕이 신검에게 왕위를 승계할 즈음에 금산사에서 여생을 마칠 목적에서 극락왕생을 서원하는 마음으로 세운 것으로 보인다”고 추정했다. 이어 “금산사는 후백제 왕실의 원찰(願刹)이었을 것”이라며 “견훤왕은 노후에 금산사에서 기거할 계획을 세우고 극락왕생을 서원하기 위해 방등계단에 5층 석탑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고 거듭 강조했다. 학술대회에서는 방등계단 5층 석탑 조성시기에 대한 다른 의견이 제기되기도 했다.
최연식 동국대 사학과 교수는 ‘후백제 견훤과 불교계의 관계’라는 주제발표에서 “금산사가 견훤의 원찰이라는 주장에 동의한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금산사는 견훤이 창건(=중창)한 사실이 확인되는 유일한 사찰이라는 점에서 견훤이 특별히 중시한 사찰”이라는 것이다.
이어 최연식 교수는 “아들 신검이 왕위를 찬탈한 후에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한 것도 이곳이 왕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라며 “왕위를 찬탈하기는 했지만 부왕을 존숭해야 하는 입장에서 부왕이 평소 자주 방문해 편안해할 수 있는 곳을 골랐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또한 최연식 교수는 “견훤과 불교계의 관계에 대해서는 해인사 화엄학승 관혜(觀惠)스님과 중국 유학에서 돌아온 선승 경보(慶甫)스님을 지원하려 했다는 사실이 고려 초 기록에 보이지만 단편적 언급에 그쳐 자세한 상황은 알기 어렵다”면서 “그 밖의 후백제 내부의 주요 고승들의 행적이나 주요 사찰 건립과 같은 불교계 동향에 관해서는 관련 기록이 전무한 형편”이라고 밝혔다.
다만 견훤이 후삼국 시기 화엄종 승려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사실이 균여(均如, 923~973) 스님의 전기 중에 보이고 있다고 했다. 이 기록에는 “옛날 신라 말기에 가야산 해인사 두 분의 화엄학 종장이 계셨다. 한 분은 관혜(觀惠) 스님으로 (후)백제 우두머리 견훤의 복전(福田)이셨고”라고 기술돼 있다,
이밖에 학술대회에서는 △후백제 불교조각 연구의 새로운 모색(최성은 덕성여대 명예교수) △후백제의 정체성 변화와 불교미술(진정환 국립익산박물관 학예연구관) △금산사 주변 산성과 후백제(조명일 군산대 가야문화연구소 책임연구원) △금산사 계단의 연대와 <기원도경> <계단도경>과의 관련성(이진영, 일본 도시사대학 강사) △김제 금산사 석조미술의 특징과 의의(엄기표 단국대 교수) △금산사의 건축문화(도윤수 동국대 불교학술원 문화유산팀장) △근현대 김제불교와 금산사(문광스님, 동국대 불교학술원 HK연구교수) 등 다양한 논문이 발표됐다.
첫날 학술대회를 마치면서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장 정덕스님은 “연구자들이 정성이 깃든 연구결과를 발표해주어 성공적이고 풍성한 학술대회가 됐다”면서 ”계속 발전시켜 나가면 앞으로 커다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총평을 했다.
학술대회 둘째 날인 11월 25일에는 오전 10시부터 금산사 처영기념관에서 △후백제의 조각과 불교미술 △금산사의 석조유물과 건축문화를 주제로 심층토론과 종합토론이 이뤄졌다. 최연식 동국대 교수가 좌장을 맡은 토론에는 엄기표 단국대 교수, 도윤수 동국대 불교학술원 문화유산팀장, 최성은 덕성여대 명예교수, 진정환 국립익산박물관 학예연구관이 참석했다.
김성욱 김제시청 학예연구사는 “(김제시에서는) 후백제 역사 문화권과 관련해 전북도와 함께 역사문화권 관련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면서 “김제시는 후백제의 정신적 중심지로의 금산사 역할을 중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 이성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