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지대방  >  행사소식


태공당 월주 대종사 스님을 추모하는 게시판입니다.  

인연있는 분들이 사연을 나누며 대종사님이 걸어왔던 보현행원의 삶을 함께 추모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사랑합니다

 추모의 글

사랑합니다

성우(동국대학교 이사장)


은사스님! 소승은 도법 사형님처럼 여러 책을 저술하거나 수준 높은 문필가이거나 명망 있는 수행승이 아닙니다. 
다만 무늬만 그럴듯한 교수에 불과했고, 학위논문과 연구논문 이외에는 저술활동이 전무했기에 추모의 글을 작성할 훤칠한 인재는 못되지만 그래도 제 눈높이에 맞게 솔직하게 몇자 적어보겠습니다. 
혹여 마음에 흡족하지 않으시면 개의치 마시고 그냥 흘려보내셔도 기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제 나이 17세, 벽두 새벽부터 눈보라가 매섭게 후려쳤던 양력 1974년 1월 1일 생모의 영정을 끌어안고 공동묘지에 묻었습니다. 그때는 워낙 강한 심장을 가진 철부지라 단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았고, 한순간의 미련조차도 갖지 않았습니다. 문자 그대로 일천제였습니다.
그러나 스님을 잃어버린 불초 제자의 눈물은 서해 바다가 되어도 아직 멈추지 않는 것은 아마 생모보다는 30년이나 더 많은 삶을 스님에게 의지하였고, 생전에 스님의 건강을 잘 챙겨드리지 못한 뒤늦은 후회와 자책의 눈물이기에 그렇습니다.


사람에게 의지하지 말고 법에 의지하라고 말씀하셨던 스님의 교계를 망각한 제자를 장군죽비로 경책하여 주십시오. 백 대든 천대든 기쁜 마음으로 다 맞겠습니다. 행자 때 개운사에서 오십 대의 몽둥이를 맞았고, 백상원에서도 곧잘 몽둥이를 맞아왔기에 이력이 생겨서 스님의 장군죽비쯤은 추호도 두렵거나 무섭지 않습니다. 스님의 장군죽비는 언제나 중생을 평등한 동일법성체로 인도하는 대자대비의 채찍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스님은 평소 말이 앞서기보다는 먼저 행동으로 실천하시는 분이라고 자칭하셨습니다. 
그러나 스님이야말로 동체대비를 실천하는 보현보살은 물론, 동시에 문수보살에 비견되는 의미심장한 명언들을 설파하셨습니다. “배고픈 사람에게는 밥을 주고, 진리에 목마른 사람에게는 법을 주어야 한다.”고 법문집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경전 가운데도 유사한 내용은 있지만, 그 온도 차는 스님의 가르침에 더 많은 무게가 느껴집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밥과 법은 점 하나를 밖에다 찍느냐 안에 찍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 획수까지 모두 동일합니다. 이 둘은 중생에게 있어서 선택이 아니라, 절대 필수입니다. 전자는 육체적 건강, 후자는 정신적 건강의 근간이 됩니다. 밥과 법의 조화로운 양육과 수행을 통해 육체와 정신이 가장 건강한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시대를 이끌어가는 선지식이요, 보살의 화신입니다. 

스님의 법체는 이 두 가지 요건을 원융무애하게 갖추셨기에 법문집에 각인시켜 놓으셨습니다. 팔만사천대장경도 모두 밥과 법에 귀결될 뿐만 아니라, 80의 노구에도 불구하고 법문하실 때는 항상 “49세”라고 말씀하셨던 스님의 청정한 사자후가 오늘따라 새삼 듣고 싶고 사무칩니다.


스님께서는 문제가 있는 현장 현장마다 참 주인공이셨습니다. 
시·처·인을 초월하여 백천만억의 화신으로 나투셨습니다. 캄보디아에는 깨끗한 우물과 교육 시설, 미얀마에는 교육 시설과 도서관, 지진이 발생한 네팔에는 교육기관과 식수 시설, 케냐에는 농업학교와 지하수, 몽골에는 유치원과 초등학교, 나눔의 집에서는 항일투사 등등, 국내외 자비가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 나투지 않는 곳이 없으셨습니다. 오늘도 조촐한 헌공을 받으시러 은적사 대웅전에 나투셨습니다. 우아한 석채화장으로 단장하시고, 백만 불짜리 청정한 미소를 지으시며 사자좌에 좌정하셨습니다.


2020년 11월 10일 수원 라마다에서의 오찬이 스님과 최후의 오찬이었습니다. 
영화사로 가서 제차로 스님을 모실 때, 법안이 퉁퉁 부어 있으셨습니다. 그때 아침 일찍 일어나 목욕재계하고 삭발하느라 비눗물이 눈 안으로 들어가서 좀 부은 것 같다고 변명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과거 23일간이나 서슬이 시퍼런 군사정권 때도 당당히 조사를 받았는데, 호텔에서 맛있는 오찬을 즐기고 당당하게 경찰 조사에 응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장장 6시간의 조사를 마치고 경찰청을 나오시면서 제 손을 꼭 잡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함박웃음을 지으셨습니다. 그때 스님의 손과 미소야말로 천진난만한 천진불의 수인과 염화미소였습니다. 그 이후 입적하시기 전까지 소승은 혼자서 산해진미를 많이 먹고 다녔지만, 스님의 건강을 챙기는 정찬 한 끼 더 챙기지 못해 정말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스님, 땡초 성우 제발 용서해주시고, 오늘 그때처럼 꼭꼭 맛있게 흠향하여 주십시오.


제가 스님 앞에서 제 흉 좀 보겠습니다. 
재롱으로 생각하시고 애교로 귀엽게 봐주십시오. 제자는 절대 손해 보는 일을 하지 않는 깍쟁이요, 구두쇠입니다. 그러나 스님께서는 “주지가 부자면 절집이 가난하고, 주지가 가난하면 절집이 부자가 된다.”고 하신 명언에 단박 속아 꼬박 6년 9개월 동안 금산사 머슴 노릇 좀 했습니다. 인건비를 절약하기 위해서 재무업무만 빼고 혼자서 6직 업무를 컴퓨터 한 대로 해결했고, 개인적으로 보시를 받으면, 꼬박꼬박 사찰통장으로 입금하고, 한푼 두푼 모아 전주혁신도시에 천오백 평의 수현사를 준공하였고, 3년째 세계평화명상센터 건축 불사를 시행해오고 있습니다. 
이제는 그런 대형 불사는 꿈꾸기조차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인플레이션으로 건축비가 4년 전보다 무려 1.5배에서 2배까지 껑충 뛰어버렸고, 불사를 격려하고 감독하고 기뻐해 줄 은사 스님이 이제는 없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지구촌공생회 회관건립기금으로 아주 적은 8억1천만 원밖에 입금하지 못했습니다. 스님의 감동적인 명언에 속아 매월 박봉을 받고 금산사 주지를 살았던 추억을 회상하면 바보 같고 후회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현재 제가 받는 보시에 비하면 금산사 주지 보시는 한낱 조족지혈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스님 정말 고맙습니다. 
스님께서는 영화사에서 금산사로 내려오시면, 반드시 불사 현장을 손수 방문하시고 “수고했어, 성우스님! 오늘 저녁은 내가 살게.” 그 한마디를 듣는 순간 피곤이 절로 풀렸고, 그날 밤은 여명이 트는지 모른 채 단잠을 이룰 수가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소승은 월급쟁이로만 살겠습니다. 군법사 때도 그랬고, 교수 생활도 그랬고, 은적사와 금산사 주지 때도 그랬고, 현재도 그러하듯 초지일관 월급쟁이로만 살겠습니다. 


한가지 예외는 있습니다. 
29년 동안 나눔의 집과 18년 동안 지구촌공생회 이사장직을 스님께서는 보시 한 푼 받지 않고 무보수로 헌신하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함께 일하는 재단, 경실련, 우리민족서로돕기 등, 모든 단체의 이사장을 무보수로 국가와 국민을 위해 헌신하셨습니다. 스님께서는 한국 불교 역사상 NGO의 유일무이한 대부이셨습니다. 그 불퇴전의 보현행원을 소승도 일생 동안 무보수로 이어나가겠습니다. 그것이 수행자의 정체성과 진정성이어서가 아니라, 마음이 가장 편할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더욱이 아무도 가지 않는 그 고난의 길을 스님께서는 직접 개척하셨고, 그 청정무구한 여정을 직접 열어 보여주셨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스님, 사랑합니다. 정말로 영원히 사랑합니다.
사랑하는 스님! 그렇게 생사열반이 일여할 진데 어디로 훌쩍 떠나셨습니까? 
혹시 환지본처 하셨습니까? 멋진 본지풍광을 다시 한번만 더 보여주십시오! 
스님께서는 떠나셨지만, 제자는 아직 스님을 떠나보내지 않았습니다. 
스님의 행원은 바로 우리들이 부단히 수행해야 할 보현행원이기 때문입니다. 
스님 그동안 중생들과 함께 동고동락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리고, 또 경배 드립니다.


불기 2565년 8월  불초 제자 성우 삼가 올림

6 0

Tel.063-548-4441~3 | Fax. 063-548-1390 | geumsansa@hanmail.net
54343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모악15길 1(금산리 39)  모악산 금산사  |  주지 지문 화평

고유번호 405-82-01608  | Powered by Planning Studio Yeoreu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