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중 / 前 동대부여고 교장
큰스님께서 열반하셨다는 부음을 듣고 저희 부부는 가슴이 철껑 내려앉는 충격을 받고 오열합니다. 코로나 시국이라서 올해 세배는 내년으로 미루자고 하셨습니다. 뵈올 때마다 워낙 강건하시고 말씀도 잘 하셔서 백세를 함께 사실 줄 알았는데, 이리 홀연히 저희들 곁을 떠나시니 이제 저희는 누구를 의지하고 살아야 합니까.
천하 영웅도 세월은 이기지 못한다는 말이 있듯이 한국불교의 가장 큰 별인 태공당 송월주 큰스님께서 87세의 세연을 거두시었습니다. 부처님의 수복(壽福)인 불세(佛歲)보다도 7세를 더한 천수를 누리셨지만 저희 불자들은 아쉽고 애통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큰스님을 국가의 원로로서 이 시대의 진정한 스승이시고, 군사독재 권력에 굴복하지 않고 수행자의 의연함을 지킨 참 스님이라고 말합니다. 17대, 28대 조계종 총무원장을 역임하면서 뛰어난 영도력과 지혜를 통하여 종단 개혁회의의 선봉에 서서 종단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급할 때 반석 위에 일으키셨습니다. 큰스님의 화두는 오직 조계종의 중흥과 발전이었습니다. 그 때 주창하신 깨달음의 사회화운동은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주었고 우리 불자들이 나아갈 신행의 지표와 불교가 사회 속에서 해야 할 역할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2003년 창립한 지구촌공생회의 활동은 “다 함께 행복할 수 있어야 진정한 깨달음이다”는 기치를 걸고 국경을 넘어 동남아 5개국 현지 구호사업을 전개한 업적은 부처님의 자비정신을 실천한 최고의 중생구제의 실천행입니다. 국제적인 NGO단체로 성장하여 급기야 2014년에는 캄보디아에 생명의 우물을 2091기를 파주는 대업을 이루고, 수많은 학교를 세워줘서 한국불교와 대한민국의 위상을 세계만방에 드러냈습니다.
이를 인정하여 정부에서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했고, 캄보디아와 미얀마정부는 국왕이 직접 최고 성승(聖僧)의 칭호를 부여했습니다. 뜻있는 불자와 국민들은 큰스님이 하시는 이 일에 흔연히 동참하여 공업(共業)의 아름다운 불사를 이루었습니다. 제자도 매월 1만 원씩 후원하여 빈곤국가에서 오염된 물을 먹고 사는 아이들에게 급수공덕(汲水功德)을 짓는 것이 한없이 행복합니다.
제자가 큰스님을 처음 뵈었을 때가 1981년 9월입니다. 큰스님께서는 전두환 군부세력에 의하여 총무원장에서 물러나 개운사에 계셨고, 저는 개운사 옆에 있는 동국대학교 기숙사인 기원학사 사생장을 할 때입니다. 매년 명절마다 기숙사 학생들에게 과일을 두 상자씩 보내준 은혜의 보답으로 생신날을 맞춰서 찾아뵈었지요.
그 때 조계종에서 전두환 군부정권 찬양법회를 거절한다고 10·27불교법난을 자행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불교가 지난 정권의 허수아비가 되는 허약한 모습에서 파탈하여 의연한 종단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스님께서 명령만 내리면 우리 기숙사 학생을 몰고 가서 전두환을 척살하겠다”고 호기를 부렸던 기억이 납니다.
그 후 제자는 불교대학을 졸업하고 우리 동국학원 명성여중(동대부여중)의 교법사로 부임하여 구의동 영화사에서 자주 뵈었고 40여 년을 모시는 유발제자가 되었지요.
특히나 1989년부터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공동대표을 하실 때부터 경실련 상임집행위원, 경불련 창립위원, 공해추방불교인모임(청정국토만들기운동본부) 창립위원 및 사무처장을 하면서 오늘까지 40여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제자의 젊은 시절을 큰스님께서 하신 불교시민운동을 따라서 배우고 실천했습니다.
그 때 시민운동을 했던 저희들은 “공해추방운동(환경). 불교인권위원회(인권),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경불련, 공명선거실천시민연합, 지역감정해소 국민운동협의회, 남북협력 우리민족서로돕기, 실업극복국민운동위원회, 나눔의 집(위안부 돕기) 등 불교시민운동은 월주 스님 한 사람이 모두 한 것이네. 앞으로 한국현대불교사를 쓰게 되면 월주 스님뿐이네”라고 말했습니다. 큰스님의 원력은 참으로 대단했고 칭찬을 받을 만 합니다.
시민단체마다 지원금을 달라고 영화사에 발길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모든 단체가 큰스님이 창립한 단체입니다. 그때는 고승서화전이 인기가 있었는데 어느 젊은 스님이 돈이 없으면 서예글씨라도 써주면 그것을 팔아서 운영비에 보태겠다고 실제로 붓과 벼루, 종이를 준비해 간 일화와 ‘전법도생(傳法渡生)’이라고 쓴 작품은 유명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큰스님께서 서예를 하게 된 연원입니다.
제자가 동국대학교사범대학부속여자중학교 교장에 취임하자 큰스님께서 “귀일심원(歸一心源 요익중생(饒益衆生)”의 축하휘호를 써주셨습니다.
큰스님께서 저의 손을 꼭 잡으시면서 하신 “환경운동을 해야 한다. 김법사가 청정국토만들기운동본부를 없애지 말고 잘 유지해라”는 말씀을 명심하고 있습니다. 제자는 스님의 명에 따라 영화사 거사회 법회를 10여 년을 담당하는 지도법사를 하였습니다. 큰스님은 저를 단련시키고 키운 스승이시고, 자애로운 아버지와 같은 분입니다.
큰스님께서는 “앉아서만 성불할 수 없다. 진리는 세간 속에 있다”고 하시면서 불교의 전통 수행인 참선과 보현행을 함께 실천해야 함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리고 큰스님께서는 중도와 균형을 실천하셨습니다. 불교인의 수양은 심성 수양을 위한 참선, 경전 공부, 보살행 실천을 균형 있게 함께 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실제로 보수와 진보에 대해서도 균형감(6:4론)을 잃지 않았습니다.
큰스님께서는 지혜와 복덕을 잘 갖추시고 우리 불교종단을 위하여 많은 일을 해내신 원력보살이십니다. 국가의 원로로서 불교의 사회적 역할을 통하여 역대 대통령의 자문과 존경을 받으셨습니다. 상좌들도 모두 훌륭하여 기라성처럼 빛나는 한국불교의 대들보입니다. 큰스님께서는 정말 복이 많으신 분으로 저희들에게 복을 나누어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보고 싶습니다.
큰스님, 스님을 못 잊고 그리워하는 불자들의 마음속에 하얀 연꽃으로 피어나십시오. 부처님의 밝은 미소를 닮은 가을밤에 둥근달로 떠오르십시오.
불초 제자 김형중은 곡배(哭拜)하며 추도의 글을 올립니다.
출처 : 현대불교신문(http://www.hyunbulnews.com)
김형중 / 前 동대부여고 교장
큰스님께서 열반하셨다는 부음을 듣고 저희 부부는 가슴이 철껑 내려앉는 충격을 받고 오열합니다. 코로나 시국이라서 올해 세배는 내년으로 미루자고 하셨습니다. 뵈올 때마다 워낙 강건하시고 말씀도 잘 하셔서 백세를 함께 사실 줄 알았는데, 이리 홀연히 저희들 곁을 떠나시니 이제 저희는 누구를 의지하고 살아야 합니까.
천하 영웅도 세월은 이기지 못한다는 말이 있듯이 한국불교의 가장 큰 별인 태공당 송월주 큰스님께서 87세의 세연을 거두시었습니다. 부처님의 수복(壽福)인 불세(佛歲)보다도 7세를 더한 천수를 누리셨지만 저희 불자들은 아쉽고 애통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큰스님을 국가의 원로로서 이 시대의 진정한 스승이시고, 군사독재 권력에 굴복하지 않고 수행자의 의연함을 지킨 참 스님이라고 말합니다. 17대, 28대 조계종 총무원장을 역임하면서 뛰어난 영도력과 지혜를 통하여 종단 개혁회의의 선봉에 서서 종단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급할 때 반석 위에 일으키셨습니다. 큰스님의 화두는 오직 조계종의 중흥과 발전이었습니다. 그 때 주창하신 깨달음의 사회화운동은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주었고 우리 불자들이 나아갈 신행의 지표와 불교가 사회 속에서 해야 할 역할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2003년 창립한 지구촌공생회의 활동은 “다 함께 행복할 수 있어야 진정한 깨달음이다”는 기치를 걸고 국경을 넘어 동남아 5개국 현지 구호사업을 전개한 업적은 부처님의 자비정신을 실천한 최고의 중생구제의 실천행입니다. 국제적인 NGO단체로 성장하여 급기야 2014년에는 캄보디아에 생명의 우물을 2091기를 파주는 대업을 이루고, 수많은 학교를 세워줘서 한국불교와 대한민국의 위상을 세계만방에 드러냈습니다.
이를 인정하여 정부에서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했고, 캄보디아와 미얀마정부는 국왕이 직접 최고 성승(聖僧)의 칭호를 부여했습니다. 뜻있는 불자와 국민들은 큰스님이 하시는 이 일에 흔연히 동참하여 공업(共業)의 아름다운 불사를 이루었습니다. 제자도 매월 1만 원씩 후원하여 빈곤국가에서 오염된 물을 먹고 사는 아이들에게 급수공덕(汲水功德)을 짓는 것이 한없이 행복합니다.
제자가 큰스님을 처음 뵈었을 때가 1981년 9월입니다. 큰스님께서는 전두환 군부세력에 의하여 총무원장에서 물러나 개운사에 계셨고, 저는 개운사 옆에 있는 동국대학교 기숙사인 기원학사 사생장을 할 때입니다. 매년 명절마다 기숙사 학생들에게 과일을 두 상자씩 보내준 은혜의 보답으로 생신날을 맞춰서 찾아뵈었지요.
그 때 조계종에서 전두환 군부정권 찬양법회를 거절한다고 10·27불교법난을 자행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불교가 지난 정권의 허수아비가 되는 허약한 모습에서 파탈하여 의연한 종단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스님께서 명령만 내리면 우리 기숙사 학생을 몰고 가서 전두환을 척살하겠다”고 호기를 부렸던 기억이 납니다.
그 후 제자는 불교대학을 졸업하고 우리 동국학원 명성여중(동대부여중)의 교법사로 부임하여 구의동 영화사에서 자주 뵈었고 40여 년을 모시는 유발제자가 되었지요.
특히나 1989년부터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공동대표을 하실 때부터 경실련 상임집행위원, 경불련 창립위원, 공해추방불교인모임(청정국토만들기운동본부) 창립위원 및 사무처장을 하면서 오늘까지 40여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제자의 젊은 시절을 큰스님께서 하신 불교시민운동을 따라서 배우고 실천했습니다.
그 때 시민운동을 했던 저희들은 “공해추방운동(환경). 불교인권위원회(인권),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경불련, 공명선거실천시민연합, 지역감정해소 국민운동협의회, 남북협력 우리민족서로돕기, 실업극복국민운동위원회, 나눔의 집(위안부 돕기) 등 불교시민운동은 월주 스님 한 사람이 모두 한 것이네. 앞으로 한국현대불교사를 쓰게 되면 월주 스님뿐이네”라고 말했습니다. 큰스님의 원력은 참으로 대단했고 칭찬을 받을 만 합니다.
시민단체마다 지원금을 달라고 영화사에 발길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모든 단체가 큰스님이 창립한 단체입니다. 그때는 고승서화전이 인기가 있었는데 어느 젊은 스님이 돈이 없으면 서예글씨라도 써주면 그것을 팔아서 운영비에 보태겠다고 실제로 붓과 벼루, 종이를 준비해 간 일화와 ‘전법도생(傳法渡生)’이라고 쓴 작품은 유명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큰스님께서 서예를 하게 된 연원입니다.
제자가 동국대학교사범대학부속여자중학교 교장에 취임하자 큰스님께서 “귀일심원(歸一心源 요익중생(饒益衆生)”의 축하휘호를 써주셨습니다.
큰스님께서 저의 손을 꼭 잡으시면서 하신 “환경운동을 해야 한다. 김법사가 청정국토만들기운동본부를 없애지 말고 잘 유지해라”는 말씀을 명심하고 있습니다. 제자는 스님의 명에 따라 영화사 거사회 법회를 10여 년을 담당하는 지도법사를 하였습니다. 큰스님은 저를 단련시키고 키운 스승이시고, 자애로운 아버지와 같은 분입니다.
큰스님께서는 “앉아서만 성불할 수 없다. 진리는 세간 속에 있다”고 하시면서 불교의 전통 수행인 참선과 보현행을 함께 실천해야 함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리고 큰스님께서는 중도와 균형을 실천하셨습니다. 불교인의 수양은 심성 수양을 위한 참선, 경전 공부, 보살행 실천을 균형 있게 함께 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실제로 보수와 진보에 대해서도 균형감(6:4론)을 잃지 않았습니다.
큰스님께서는 지혜와 복덕을 잘 갖추시고 우리 불교종단을 위하여 많은 일을 해내신 원력보살이십니다. 국가의 원로로서 불교의 사회적 역할을 통하여 역대 대통령의 자문과 존경을 받으셨습니다. 상좌들도 모두 훌륭하여 기라성처럼 빛나는 한국불교의 대들보입니다. 큰스님께서는 정말 복이 많으신 분으로 저희들에게 복을 나누어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보고 싶습니다.
큰스님, 스님을 못 잊고 그리워하는 불자들의 마음속에 하얀 연꽃으로 피어나십시오. 부처님의 밝은 미소를 닮은 가을밤에 둥근달로 떠오르십시오.
불초 제자 김형중은 곡배(哭拜)하며 추도의 글을 올립니다.
출처 : 현대불교신문(http://www.hyunbulnews.com)